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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칼 구스타프 융은 어떤 사람이었는가1

by 2보리 202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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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아동기

바젤 대학 의학부의 저명한 교수였던 할아버지의 이름을 본떠서 칼 구스타프라고 이름지어진 칼 구스타프 융은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동북부의 콘스탄스 호반에 있는 케스빌이라는 조그만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스위스의 개혁파 목사의 장남으로 단 하나의 아들이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이 생후 6개월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라우펜의 한 교구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의 어머니가 신경장해를 일으켜 몇 달동안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 융은 숙모와 하녀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오랜 부재는 융에게 깊은 슬픔을 가져와 '사랑'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연상되는 것은 불신감을 갖게 되었고 오랫동안 믿을 수 없는 존재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어렸을 때 칼 구스타프 융은 검은 옷차림의 근엄한 사람들 옆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아버지 이외에 융의 숙부들 중에 목사가 여덟 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런 근엄한 사람들의 모습은 오랫 동안 융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홉살이 될 때까지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융은 혼자서 놀았습니다. 융은 새로 태어난 여동생에게도 무관심했습니다. 여동생의 존재를 무시하고 언제나 혼자서 놀았고 그때부터 이미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침착하지 못하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정서 장해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은 나무를 깍아서 만든 인형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열한 살 때 융은 마을 학교에서 바젤 시의 큰 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융은 새로운 급우들을 부러워 하며 아버지의 가난을 깨달으며 동정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이 흥미로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학교에 다니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았기 때문에 학교가 싫어졌습니다.  그는 신학 수업은 지루했고 수학시간은 따분하고 체육을 싫어했는데 발작이 일어나면 그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되어서 신경 발작을 자주 일어나게 되면서 6개월이상이나 학교를 쉬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아버지의 서재에 빠져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융은 자기의 꿈, 경험, 감정을 누구에게도 구태여 말하려고 하지 않고 종교에 관한 질문은 터부시하였습니다.

 

2.청년기

칼 구스타프 융의 종교적 갈등은 청년 시절에도 줄곧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책을 읽고 의문을 풀려고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이 문제에 열중하다가 싫증을 느끼면 시, 희곡, 역사를 읽고 기분을 풀었고, 아버지와의 종교적인 토론은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로 끝났습니다. 목사인 아버지는 가시 돋친 토론에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지만 얄궂게도 만년에는 아들 융이 체험한 것 이상으로 심한 종교적 갈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학 문제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칼 구스타프 융은 학업에 더욱 열중하게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습니다.

 

16세가 지나자 칼 구스타프 융의 종교에 대한 갈등은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 측히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서서히 대치되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이 칼 구스타프 융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나 특히 좋아하는 것은 고뇌, 혼란, 정열, 악의 문제를 논한 쇼펜하우어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눈에 비친 그대로 인생을 서술했고 인간성의 추악한 면을 감추려 하지 않아서 이 철학은 융에게 신선한 인생관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무렵 융은 의심이 많고 수줍어하는 인간형에서 적극적이고 대화를 즐기는 인간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젊었을 때 칼 구스타프 융이 갖고 있던 자기 이미지는 종교적, 철학적인 의문에 시달리고 세계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고독하고 책을 좋아하는 인텔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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