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는가? 신체적으로 면을 말하면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며 강건했습니다. 등산가이고 능숙한 조타수였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자연과학의 구체적인 지식에 마음에 끌렸으나 비교종교학이나 철학도 버리기 아까웠습니다. 어느 숙부가 신학을 공부하라고 강력히 권유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반대하여 칼 구스타프 융은 단념했습니다.
융은 자연과학을 택하기도 했고 의학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융이 그 이름을 물려받은 조부는 옛날 바젤대학의 의학교수였었습니다. 융의 흥미가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으로 옮겨져서 정신의학 연구야말로 자기가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00년 12월 융은 취리히의 부르크횔츠리 정신병원의 조수로 첫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은 자기가 선택한 전공에 익숙해지기 위해 6개월 동안 병원에 파묻혀 환자를 관찰하고 정신의학의 문헌을 광범하게 공부하였습니다. 1902년에 몇 달 동안 파리에서 지내며 프랑스의 위대한 정신의학자 피에르 자네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칼 구스타프 융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은 1890년대에 발표된 프로이크와 브로이어의 히스테리 연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이것이 1900년대 간행되었을 때 읽고 정신의학자를 위한 ‘지혜의 샘’이라고 말했습니다. 1905년 30세 때 융은 취리히 대학의 정신의학 강사, 그리고 정신과 진료소의 급 의사가 되었습니다. 융은 프로이트의 저서가 나오는 대로 계속 탐독하고 자기 논문의 사본과 최초의 저서 <조발성치매성의 심리>를 프로이트에게 보냈습니다. 거기서 칼 구스타프 융은 프로이트의 견해를 지지했으나 특히 소아기의 성적 외상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약간의 유보 조건을 달았습니다. 프로이트는 1907년 융에게 빈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접촉이 시작되어 6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909년에는 두 사람이 모두 클라크 대학에서 강연해 달라는 초청을 받아 7주 동안 함께 여행을 했고 1912년 칼 구스타프 융은 다시 미국에 건너가 포드햄대학에서 정시분석 이론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국제정신분석협회가 창립되자 융은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라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몇 해 동안 프로이트파의 정신분석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자기의 독자적인 정신분석 체계를 발전시켜 그것을 처음에는 ‘콤플렉스 심리학’이라고 불렀고, 후에는 분석 심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체계는 일련의 개념과 이론적 공식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도 포함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 직업 활동 현장을 상담실에만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 자기 사상을 응용하여 많은 사회 문제, 종교문제, 현대 예술의 여러 경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또한 칼 구스타프 융은 위대한 저술가여서 취리히 시는 1932년 그에게 문학상을 수여했습니다. 융은 충실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유식한 스위스 시민으로서 ‘자유사상’또는 민주당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의사, 정신의학자, 정신분석가, 교수, 학자, 저술가, 사회비평가, 가족의 일원, 시민 모두였습니다. 그러나 첫째로 그는 정신 연구가였고 심리학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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